책정보
제목: 아몬드
저자: 손원평
출판사: 창비
출간연도: 2017년
알락세티미아
뇌 편도체는 두려움, 분노, 불안과 같은 감정을 인식하고 조절한다. 위협적인 자극을 빠르게 감지하여 위험을 회피하는 역할을 하고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고 반응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 형성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가 너무 작거나 기능이 저하되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의학적 상태를 ‘알렉시티미아’라고 한다.
청소년문학이자 백만부 이상이 팔린 ‘아몬드’에 나오는 주인공 윤재는 알렉시티미아 질환을 가졌다. 윤재의 엄마는 아몬드가 편도체의 기능을 원활히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매일 아몬드를 챙겨준다. 하지만 아몬드가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만 할머니와 엄마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며 엄마의 다양한 감정훈련 덕분에 (화난표정, 슬픈 표정, 기쁜 표정 이해하기, 고마워, 미안해 등 말하기) 타인의 감정을 이론적으로는 알 수 있다.
반면 곤은 모든 외부 자극에 굉장히 민감하고 폭력적으로 반응하며 사랑이라고는 애초에 받고 자라지 못한 반항아에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온 아이다.
그리고, 달리기를 잘하고 좋아하는 여름날 비온뒤 나뭇잎 끝에 매달려 있는 빗방울 같은 깨끗한 도라가 등장한다.
묻지마 살인의 희생자 할머니와 엄마
크리스마스 이브, 윤재와 할머니, 엄마는 시내로 나가 저녁을 먹은 후 식당문을 나선다.
윤재가 식당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 어느 한 남자가 망치로 엄마의 머리를 내리쳤고, 할머니는 식당 문을 열고 나오려는 윤재를 온몸으로 막아서다 칼에 찔려 사망한다. 엄마는 생명은 건졌지만 식물인간이 되었다.
이유 없는 살인, 즐거울 것 하나 없는 세상 속에서 웃고 있는 사람을 보면 증오를 느낀다던 살인마. 그 피해자가 크리스마스 이브 날 함박웃음 지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윤재엄마와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장례식 동안 눈물한 방울 흘리지 않고 무표정하던 윤재. 알렉시티미아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에 눈물이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싸이코패스라는 말까지 나돈다.
곤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소년원까지 다녀온 아이다.
세상의 고통과 불행은 모두 겪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또래보다 강하고 우위에 있다는 걸 폭력적으로 표현하는 아이다.
윤재가 곤의 친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아들노릇을 했다는 걸 알게 된 곤은 윤재를 죽어라 괴롭히는데, 윤재는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곤이 두렵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다. 그런 윤재의 반응에 호기심을 갖게 되는 곤.
곤의 친아버지도, 친구들, 선생님들조차 곤의 겉모습과 언행을 보며 폭력적인 아이라고, 문제아라고 판단하며 곤이 왜 그런 행동들을 했는지 어떤 경험들을 해 왔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윤재는 곤을 있는 그 자체로 봐준다.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고 비판도 하지 않으며 곤이 착한 아이라는 것도 알아준다.
둘은 곧 친구사이가 된다. 곤은 나비하나 제대로 죽이지도 못하는 아이였으며 윤재에게 ‘감정’이라는 걸 알려주려고 노력하는 아이기도 했다.
도라는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윤재의 엄마에게 인사를 하며 윤재에게도 엄마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어차피 식물인간이라 듣지도 못한다고 생각한 윤재는 도라의 부탁에 자신의 엄마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꽤 괜찮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도라에게 특별한 감정, ‘설렘’ ‘사랑’을 느끼는데 책에서는 이러한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윤재의 신체적 변화 즉 심장박동의 빨라짐, 체온의 상승, 현기증 등으로 표현한다.
알렉세티미아라도 ‘사랑’에 대한 감정을 신체적 변화로 느끼게 되며 혼란스러운 윤재를 보며 독자로서 괜스레 함께 설렜다.
대학교 때 소개팅을 통해서 한 달 정도 만났던 사람이 있다. 한 달 정도 됐을 때 대차게 차였는데 이유가 “너가 날 진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표현을 너무 안한다.”라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겨우 한 달밖에 안됐는데 표현을 뭘 얼마나 했어야 했나 싶은데, 한편으로는 내가 그렇게까지 감정 표현이 없었던가? 싶었다.
이후 오랫동안 만난 남자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날 바라보는 너의 눈을 보는 게 너무 좋아. 네 눈을 보고 있으면 너가 얼마나 나를 좋아해주는지 알 수 있어. 내가 이렇게까지 사랑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야.”
딱히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사람을 너무나 좋아했고 존중했으며 오랜 기간 동안 매일 설레는 맘으로 만났다. 감정이라는 게 굳이 말이 아니더라도 눈빛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다는 걸 그때서야 완전하게 깨달았다.
곤도 살리고 윤재 자신도 살렸다
곤은 윤교수인 친아버지와 사이가 점점 틀어지며 불량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방황하다 ‘철사’라는 사람 밑에 들어가게 되고 윤재는 곤을 찾게 된다. 다들 ‘철사’라는 사람에게 가는 걸 경고했지만 윤재는 곤을 위해 주저 없이 구하러가는데.
결국 곤도 살리고 윤재 자신도 살렸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정상범주에서 살아가려면 적절한 반응과 말을 전해야 한다는 엄마의 조언대로 고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제때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곤을 위해 주저없이 위험에 뛰어듦으로써 윤재는 사랑이라는 걸 배워갔다. 그게 사랑인 줄 몰랐고, 기쁨인줄도 몰랐으며, 설렘인 줄도 몰랐지만 자신이 한 걸음씩 나아갔던 그 발걸음들이 사실은 감정을 하나 둘 씩 스스로 깨우쳐가는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감정이 없는 주인공의 성장 소설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사랑’이 가득한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윤재가 할머니와 엄마로부터, 곤과 도라에게 받은 사랑으로 인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진짜 사랑을 알고 있는 걸까? 반문하며 책을 덮게 된다.